우리문화~판소리

심청가.수궁가.흥보가.춘향가.적벽가/모두완창!..

바람처럼 어디로 갈거나 2008. 6. 7. 01:58

                                          

 

                                             

 

  

                                                 박봉술

 

박봉술은 1922년 전라남도 구례에서 태어나서 순천에서 자라났다. 어려서 형인 박봉래와 박봉채에게 판소리를 배웠고, 서울에 올라와서 송만갑에게 잠깐 배웠는데, 박봉래는 송만갑의 으뜸 제자로 꼽히던 명창이었다. 박봉술은 ‘아이 명창’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어릴 적부터 소리를 잘하였으나 변성기에 소리를 너무 심하게 닦다가 목이 상해 버렸다. 소리가 거칠어지고 높은 소리인 상성은 나지 않게 되자 뜻을 잃은 적도 있으나, 다시 일어나서 소리 공부를 계속하여 그 공력으로 명창이 되었다. 지금도 목이 궂으나, 소리 공력으로는 그에 맞설 명창이 드물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의 다섯 마당을 모두 익혔는데, 그 가운데서도 <춘향가>, <수궁가>, <적벽가>에서 능한 솜씨를 보이고 있다. 그의 <수궁가>는 전통적인 동편제의 더늠을 모두 간직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73년에 중요 무형 문화재 판소리 <적벽가>의 기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박봉술이 이어받은 <흥보가>는 동편제의 것이다. 동편제 판소리는 송흥록 계통과 김세종 계통과 정춘풍 계통의 소리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김세종 계통과 정춘풍 계통의 것은 전승이 끊어졌다. 송흥록의 소리는 그의 아우 송광록과 그의 으뜸 제자 박만순에게 이어졌다. 송광록은 그의 아들 송우룡에게, 송우룡은 전도성, 송만갑, 유성준, 이선유에게 소리를 전했다. 송만갑은 장판개, 김정문, 박봉래에게 소리를 전했다. 김정문은 박녹주, 강도근에게, 박녹주는 김소희, 박귀희, 한애순, 성우향, 박초선, 조상현에게, 박봉래는 아우 박봉술에게 <흥보가>를 전했다.

그리고 박만순의 소리는 오끗준, 양천학, 박기홍, 전도성, 장판개에게 전해졌으나 이들의 소리는 전승이 끊어졌다.

박봉술은 형 박봉래와 같은 집안 사람들에게 판소리를 배웠으니, 그의 <흥보가>도 형과 같은 계보로, 송흥록에게서 송광록, 송우룡, 송만갑, 박봉래를 차례로 거쳐서 그에게 전승된 것이라고 하겠다. 서편제 <흥보가>가 부드럽고 맛이 있는 데 견주어, 박봉술의 <흥보가>는 박녹주의 것과 함께 동편제로서, 꿋꿋하고 장엄하다.

동편제인 박봉술과 박녹주의 <흥보가>는 바디가 서로 거의 같은데, 조금 다르다면, 박녹주는 놀보가 박 타는 대목을 제자에게 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초앞인 놀보 심술타령을 박녹주는 잦은몰이 장단으로 부르는데, 박봉술은 중몰이 장단으로 부른다. 또 흥보가 놀보에게 매를 맞고 오자 흥보 마누라가 탄식하는 대목을 박녹주는 중몰이 장단으로 짰는데, 박봉술은 잦은몰이 장단으로 짰다. 그런가 하면, 가난타령과 흥보가 마누라를 달래는 대목을 박녹주는 중몰이 장단과 아니리로 짰는데, 박봉술은 진양 장단과 잦은몰이 장단으로 짰다. 게다가 박녹주의 <흥보가>에는 흥보가 밥을 먹는 대목이 없다. 또, 부자가 된 흥보 마누라가 놀보를 위해 술상을 차리는 대목을 박녹주는 휘몰이 장단으로 몰아가는데, 박봉술은 잦은몰이 장단으로 몰아 간다.

박봉술의 것과 박녹주의 것은 몇 대목의 장단이 좀 다르게 짜여 있기는 해도, 사설만은 서로 비슷하다. 그런데 정광수, 박초월, 박동진이 부르는 서편제 <흥보가>는 박봉술의 것과 사설까지 다른 대목이 있다. 가장 두드러진 보기를 들면, 도사가 집터 잡는 대목이 동편제에서는 “박 흥보가 좋아라고 도사 뒤를 따라간다”로 시작되나, 서편제에서는 “감계룡 간좌곤향”으로 시작된다. 또 흥보의 집에 제비가 날아드는 대목이 동편제에서는 “겨울 ‘동’자, 갈 ‘거’자”로 시작되는데, 서편제에는 “유색 황금륵 꾀꼬리는 노래하고”로 시작된다. 송만갑의 동편제 제비 노정기는 지금 거의 쓰이지 않고 있으며, 송만갑의 계보를 이은 박녹주 및 박봉술은 모두 김창환의 서편제 제비 노정기를 빌어서 부르고 있다. 그리고, 박봉술은 ‘놀보 제비 노정기’를 짰지만, 본디 그것은 어느 <흥보가>에도 없던 것이다. 박봉술은 그것을 장 판개의 ‘흥보 제비 노정기’를 따서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