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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 대학살에 관하여 요약 .

바람처럼 어디로 갈거나 2007. 2. 13. 20:20

                           

南京大虐殺

1937년 12월 13~17일을 고비로 약 2개월간 당시 중국의 수도 난징에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대학살 사건.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루거우차오[蘆溝橋] 사건 이후 반년 만에 중국의 수도 난징이 함락되었다. 일본 중지나방면군(中支那方面軍)의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대장 휘하의 5만 여 일본군은 난징으로 진격하는 도중과 점령 후 중국인 포로와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강간·학살·약탈을 자행했다. 학살의 방법은 기총에 의한 무차별 사격, 생매장,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 죽이는 등 잔인했다.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이 사실이 일반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외국인 생존자에 의해 곧바로 세계에 보도되었을 뿐 아니라 몇 가지 르포르타주나 보고서에 의해 점차 더 널리 전해졌다.

극동국제재판 판결에 따르면, 비전투원 1만 2,000명, 패잔병 2만 명, 포로 3만 명이 시내에서 살해되었고, 근교에 피난가 있던 시민 5만 7,000명 등 총 12만 9,000명이 살해되었다. 이것은 최소한의 숫자이며 실제로는 3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다른표현]

난징 점령 초기 6주일간 일본군은 무기력속에 빠진 중국군과 민간인들을 상대로 잔혹을 극한 살육행위를 저질렀다. 백기를 든 군 포로들은 물론이고 수천, 수만명의 젊은이들을 총검술훈련 혹은 `목베기 시합`의 대상물 로 삼아 무자비하게 희생시켰다. 어린 소녀, 노파 할 것 없이 여자들은 무차별로 강간한 뒤 살해해 버렸다. 사람을 산채로 파묻고 배를 가르거나 사지를 자르는가 하면 연료를 쏟아부은 뒤 불태워 죽이기도 했다.
이렇게 희생된 사람이 당시 난징 잔류인구의 절반 가까운 약 30만명에 이르렀다. 미국 새너제이머큐리지는 `사망자들이 손을 잡으면 난징~항저우 (抗州)의 3백 22㎞를
이을 수 있고 흘린 피의 양은 1천 2백톤, 시체는 기차 2천 5백량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라는 추정치를 싣기도 했다.

 

 

731부대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중국의 하얼빈[]에 주둔시켰던 세균전 부대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에 있던 일제 관동군 산하 세균전 부대이다. 1936년에서 1945년 여름까지 전쟁포로 및 기타 구속된 사람 3,000여 명을 대상으로 각종 세균실험과 약물실험 등을 자행했다.

1936년 만주 침공시 하얼빈 남쪽 20km 지점에 설립한 세균전 비밀연구소로 출발하였으며. 당시 방역급수부대로 위장하였다가 1941년 만주 731부대로 명칭을 바꾸었다. 설립 당시의 사령관은 1930년대 초 유럽 시찰을 통해 세균전의 효용을 깨닫고 이에 대비한 전략을 적극 주창한 사람은 세균학 박사 이시이 시로[] 중장()이다. 부대 예하에는 바이러스·곤충·동상·페스트·콜레라생물학 무기를 연구하는 17개 연구반이 있었고, 각각의 연구반마다 마루타라고 불리는 인간을 생체실험용으로 사용했다.

1940년 이후 해마다 600명의 마루타들이 생체실험에 동원되어 최소한 3,000여 명의 한국인·중국인·러시아인·몽골인 등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만행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살아남은 150여 명의 마루타들까지 모두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7년 미 육군 조사관이 도쿄[]에서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1936년부터 1943년까지 부대에서 만든 인체 표본만 해도 페스트 246개, 콜레라 135개, 유행성출혈열 101개 등 수백 개에 이른다. 생체실험의 내용은 세균실험 및 생체해부실험 등과 동상 연구를 위한 생체냉동실험, 생체원심분리실험 및 진공실험, 신경실험, 생체 총기관통실험, 가스실험 등이었다.

1940년 10월 27일에는 난징[]의 1644 세균전 부대와 함께 중국 닝보[]에 페스트균을 대량 살포하여 100명 이상을 사망하게 하였고, 1941년 봄에 후난성[]의 한 지역에 페스트 벼룩을 공중 살포하여 중국인 400여 명을 희생시켰다. 특히 이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 일본군도 경험 부족으로 자체 1개 사단의 병력이 감염당한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최근 731부대 장교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문서가 일본의 한 대학에서 발견되어 일본군의 세균전 및 생체실험이 사실로 입증되었다. 이에 따르면 페스트균을 배양해 지린성[] 눙안[]과 창춘[]에 고의로 퍼뜨린 뒤 주민들의 감염경로와 증세에 대해 관찰했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이로 인해 중국인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종전 후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부대원들은 세균전 연구결과를 모두 미군에 넘기는 조건으로 전범재판에 회부되지 않고 면책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정부는 일본의 전쟁범죄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731부대의 시설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23개 시설을 대상으로 2001년 3월초부터 본격적인 복원공사를 진행 중에 있다.

[참고자료]

731부대. 짧은 묘사만으로는 이시이 시로(石井四郞) 박사의 지휘
아래 한국인과 중국인을 비롯해 여러 민족이 당한 죽음의 고통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와 그의 동료는 생체해부, 동상실험, 전염병 및 외과 시술로 수
천 명을 살해했다. [이들은 생체해부 및 실험 대상인 인간을 마루
타(まるた: 통나무)라고 불렀다.]

이것뿐이랴.
이들은 가장 비인간적이고 잔학하고 가증스러운 행위를 일삼았다.
미국 정부는 이들의 연구를 계속하고자 했다.
전쟁은 세상에서 가
장 잔학한 행위를 정당화 시켜주었고, 전쟁이 끝나고서는 이 부대
에서 확보한 화학 및 생물학 기술에 대한 일본의 진보와 미국의 첨
예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
이 두 국가는 정치적으로도 전술적으로도 더 이상 껄끄러운 관계
가 아니었다.

비록 731 부대의 파렴치한 행태를 묵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일본군이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무엇인가 우위를 차지
할 수 있는 무기를 찾으려 했던 최초의 동인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

전쟁은 원래 자원이 빈약한 나라에서 주로 발생한다. 일본의 연간
철강 총생산량보다 단일 공장에서 생산해내는 양이 많은 미국과는
달리, 일본은 이미 전술적 한계를 갖고 있었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처럼 대량파괴와 살상을 위한 장비는 일본의 능력으로는
아직도 요원한 것이었다.. 통조림 따개가 일본군들에게 매우 귀한 전리품이 될 만큼 일본은 아주
단순한 전쟁 도구를 만들 원료마저 바닥 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정을 인식하고 있던 의무부대가 전쟁무기로서 각 군인의 능력을 증폭시킬 수 있
는 생물학적, 화학적 방법을 제안했을 때, 일본은 대량 학살을 위한 자신들만의 무기를 확보한 듯
이 여겼었다.

전쟁 중 '이시이'라는 한 과학자가 미래에 있을 모국의 요구를 예견했다.
이시이는 탄탄대로를 걸어왔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대학총장의 딸과 결혼하고, 군 장학금으로 유
럽의 생물학연구소에서 연구했다.
그는 또한 누구도 증명하지 못했던 뇌막염 발발이 동시 다발적이지 않을 때 사용되는 효과적인 수
막(water filter)을 개발함으로써 유명해졌다.

일본이 1931년 중일전쟁의 전리품으로 만주를 얻었을 때, 이시이는 군의과대학 박테리아학 연구소
장 자리에 올라 확고한 지위를 확보했다.
그리고 지속되는 중국과의 전쟁은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의 인간을 실험대상으로 쓸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이른바 중국 계획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작전 기지로 하얼빈이 결정되었다. 1938 년 이미 핑판에 다양한 시설을 건립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나서 이시이는 1932 년 8월 실로 막대한 예산으로 <광동군의 전염병 및 수질정화국>을 세웠
다.
이 부대는 1941년 까지는 731부대라고 불려지지도 않았고, 그 이름이 알려지지도 않았다.
1941 년에는 <광동군의 가축전염병 예방국> 작전을 수행하는 부대로서 일반적으로 100 부대로 알
려졌다. 약 3,000 명의 일본인 직원이 그의 휘하에 있었다. 그리고 충분한 노동자와 <실험 대상>이
그의 지휘체계 아래 놓이게 됨에 따라 이시이는 살아 있는 신이 되어 자신의 의료학교에서 수백 명
의 의사들을 훈련시켰다.

그러한 의사 가운데 한 명인 겐 유아사는 자신들의 활동에 대해 거리낌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주사 바늘을 살균 소독하지 않고 요추 신경을 마취하려는 의사에게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
다. 그는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는 그를 죽이려는 거야>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이내 그 마취 장난을 멈추었다. 수십 명의 중국인이 모두 발가벗겨진 상태로 온몸에 물벼락
을 맞은 채 살인적인 추위의 저녁 밤하늘 아래 밤새도록 방치되었다. 아침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
도 없었다. 이것은 살아 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행한 일종의
동상 실험이었다.
그리고 731부대 의사들은 추위에 저항력이 강한 사람들의 <피부를 벗겨내 견본을 만들어 수집했다.>

수천 명의 인간을 희생시킨 겐의 짓거리가 합리화될 수 있을까?

<이 부대에는 외과의사가 충분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안과의사와 소아과 의사들이 그런 시술을 하기
도 했다. 생체실험 대상자들은 자신을 치료해줄 것이라는 생각에 서로 싸웠다. 아니, 731의 과학자들
은 자신의 실험을 위해 수평적 폭력을 교묘하게 유발시켰던 것이다.>

분명히 겐과 그의 동료 의사들은 자신들의 동포에게 그 실험을 행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소총을 다룰 줄 아는 능력으로 선별된 의무병과 일본적십자 간호원들이 일반 시민들의 수족을 절단
하는 만행을 도왔다. 이들은 사람을 죽이는 일에 전혀 충격을 받지 않았다. 무감각으로 일관한 것이
었다.
<어떤 의사들은 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을 구덩이에 내던지려고 할 때 잠시 생각에 잠긴 후 주사기로
그들의 심장에 공기를 주입했다. 다른 의사
(731부대의 군의관은 전후 정계, 학계, 의료계, 교육계, 재
계 등 각 영역에서 높은 지위를 확보했다.)
들과 나는 그 당시 그들을 목 졸라 죽이려 했다. 마침내 한
나이 든 하사관이 말했다. "존경하는 선생님, 그들에게 마취를 하면 죽을 겁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그들을 구덩이에 내던졌다.>

실험 대상자들이 공포에 대해 무감각해지도록 부채질한 것은 731부대의 공포통치가 적지 않은 역할
을 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끊임없는 비애만 있었을 뿐이었다. 개별적인 살해에서 대량 학살
에 이르기까지 731부대는 다양한 실험을 했다. 역사가 자신들을 감싸줄 것이라는 생각에 그들은 얼마
나 효과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페스트에 감염된 쥐들을 고공 폭탄처럼 방출
했다..
42 가구에서 43 명의 사람이 죽었다. 나머지 생존자들은 각기 흩어져, 필사적으로 이 전염병을 막으려
했다.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은 <내 여동생의 죽음이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여겨집니다. 동생은 혼자
서 작은 오두막에 있었지요. 그 애를 돌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동생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동생을 보러 갔지요. 목이 심하게 부어올라 있었어요. 그리고 눈을 뜬 채 죽어 있었어요.>라고 그
날을 회상했다.

<콜레라, 탄저병, 그리고 여러 병원균이 공급되는 식수와 음식에 넣어져 제공되었어요. 어떤 경우에는
콜레라 균이 묻어 있는 사탕을 한 지방 행사에서 아이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답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731 부대의
희생자들은 여전히 그들의 만행을 인정하는 사죄를 고대하고 있다.
뉘른베르크에서 독일 전범들에 대한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아시아에서 벌어진 사건"은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대부분의 일본 전범들은 불기소 처분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으로 독일의 전쟁비밀을 보전하려는 의도로 페이퍼 클립 작전을 펼쳤듯이,
미국은 점점 확대되어가는 냉전의 위협에 대비하고자 731부대의 기밀자료를 군의관들과 거래했던 것이다.

미국은 다양한 출처를 제시하며 자신들이 일본의 잔혹행위를 미처 몰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좀더 강도 높은 조사가 신속하게 이루어져 미국의 그러한 변명을 일소해버렸다. 1949년 소련에
서 일본인 과학자들이 전범자의 지위로 하바로프스크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조사 결과가 보고서
로 작성되어 일반에게 널리 배포되었다.

그 보고서의 제목은 <세균 무기를 제조 사용한 죄로 기소된 前 일본군 문관재판> 이었다.
[1950년, 모스크바, 외국어 출판국(Foreign Language Publishing House)]

이 전범자들이 재판에 회부되기 전부터 중국은 37가지의 근거를 제시하며 국제적인 공조를 요청했다.
즉 생물 및 화학무기를 이용한 대량학살뿐만 아니라 "의료시설"에서 행해진 일반인과 전쟁포로의 살해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에 대한 국제적인 조사와 재판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요구했던 것이다.

<로키 마운틴 의학지(Rocky Mountain Medical Journal)>의 1942년 8월호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
를 실었다. "일본인들, 세균전 실험을 위해 중국인을 모르모트(Guinea Pigs)로 이용하다."

1942년 일본이 창데에 투하한 세균폭탄에 대해 미국은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 때의 대통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였다. 몇 주 후 미국은 생물학전 연구
소 건립을 정식으로 인정했다. 이를 허가한 대통령도 루스벨트였다. 다소 의아스러운 것은, 그 후 미국
정부는 일본의 세균폭탄에 대해 더 이상 비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50년 전에는 몰랐었따는 논리는 이제 더 이상 설득력을 잃은 듯하다. 수십 명의 독일 전범은 사형당하거
나 투옥되었지만, 1960년 이후 투옥되거나 사형이 실행된 일본인 과학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사실 미국과의 협정 아래 미국의 전범수사 기록은 전혀 출간되지 않았던 것이다. 731부대의
대다수 박사
처럼 이시이도 시민으로서의 영예를 획득했고, 도쿄대학 학장까지 역임했다.

731 부대의 박사들에게는 완벽한 자유가 주어졌다 그리고 미국은 외국의 과학과 과학자들을 병적으로 끌
어들이기 시작했다. 731 부대가 했던 실험 중 일부는 미국에서 지속되었을 것이다.

일찍이 한국 전쟁 때, 중국과 한국 정부는 미군이 생물학전을 행했다고 주장했었다.
최근 걸프전쟁에서 미군은 자국 병사들에게 미국 스스로 생물전 실험을 폐기하고 연구소에서 모두 박멸되
었다고 여겨왔던 병원균에 대한 예방접종을 실시했다.
그리고 미국은 틈틈이 방사능 플루토늄을 자국민에게 주사했다.

일본처럼 미국도 화학 및 생물학병기 금지협정인 제네바 협정에 늦게 가입했다.
미국이 이 협정에 가입하는 데는 5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