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다녀 가세요!·

애국지사.칠십일인. 위인전에 헌화합니다 ! ...

바람처럼 어디로 갈거나 2007. 2. 14. 01:23
          

                    

슬프다!

천하대세를 멀리 걱정하는 청년들이 어찌 팔짱만 끼고

아무런 방책도없이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을까 보냐.

그러므로

나는 생각다 못하여,

하얼빈에서 총 한 방으로 만인이 보는앞에서

늙은도적 이등의 죄악을 성토하여,

뜻있는 동양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안중근[安重根] 의사 [1879~1910.3.26]


 

안중근 (安重根 1879∼1910)

요약

조선 말기 교육가·의사(義士). 황해남도 해주 (海州) 출생.

설명

조선 말기 교육가·의사(義士). 황해남도 해주 (海州) 출생.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수학하고 승마·궁술·사격술을 익혀 문무(文武)를 겸했다. 1895년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多默(다묵)] 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산둥[山東(산동)]을 거쳐 상하이[上海(상해)]로 갔다. 1906년 석탄 상점을 정리한 뒤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세웠고, 이어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웠다. 1907년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어 항일운동을 펴다가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북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1908년 대한의군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군사령관 직책을 맡아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의병군을 이끌고 경흥(慶興)까지 쳐들어갔으나 일본군에 패배하여 탈출한 뒤 노브키에프스크로 가서 국민회·일심회(一心會) 등을 조직하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훈련을 담당하였다. 1909년 3월 노브키에프스크에서 김기룡(金起龍)·엄인섭·황병길(黃丙吉) 등 12명이 모여 단지회(斷指會)를 조직, 안중근·엄인섭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등박문)]를, 김태훈(金泰勳)은 이완용(李完用)을 암살 제거하기로 단지의 피로써 맹세하였다. 같은 해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V.N.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하여 만주(滿洲) 하얼빈[哈爾濱(합이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살해를 결의하였다. 우덕순(禹德淳)·조도선(曺道先)·유동하(劉東夏)와 저격 실행책을 세우고 하얼빈역에 잠입, 코코프체프와 열차회담을 마치고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러시아 검찰관 예비심문에서 거사 동기를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개인자격이 아닌 대한의군사령관으로서 처형하였다>고 밝혔다.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 지방법원에서 여섯 차례 재판을 받은 뒤 1910년 3월 뤼순[旅順(여순)]감옥에서 순국하였다. 많은 유필(遺筆)을 남겼으며 재감중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 ; 지금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
 

김구 (金九 1876∼1949)

요약

독립운동가·정치가. 황해도 해주(海州) 출생.

설명

독립운동가·정치가. 황해도 해주(海州) 출생.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창수(昌洙), 고친 이름은 구(龜). 자는 연상(蓮上), 초호는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 법명은 원종(圓宗), 환속명은 두래(斗來). 본관은 안동(安東).

15세부터 정문재(鄭文哉)에게 한학을 배우면서 과거공부를 하다가 부패 타락한 봉건사회에 대한 반감으로 18살에 동학에 입교하여 19세에 팔봉접주가 되었다. 1894년 해주에서 정덕현(鄭德鉉) 등과 함께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를 들고 탐관 오리와 일본인 숙청을 목적으로 일어났으나, 일본군에 쫓겨 만주로 들어가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여 활약했다.

21세 때 귀국,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는다 하여 안악(安岳) 치하포에서 일본 육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토전양량)]를 죽임으로써 의혈청년으로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이룩했으나 곧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誌)》 등을 읽고 처음으로 신학문·신문명에 접했다. 고종의 특사령이 내려져 사형은 면할 수 있었지만 당시 일본인들의 간섭·방해로 석방되지는 못하고,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이듬해 환속하여 황해도 장연에 봉양학교(鳳陽學校)를 설립, 교단에서 계몽사업에 힘쏟았다. 1905년 진남포에서 을사늑약(乙巳勒約) 소식을 듣고 이준(李儁)·이동녕(李東寧)과 함께 상소를 올리고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는 등 구국대열에 선봉이 되었다. 1909년에는 안중근 의사 의거에 관련된 혐의로 해주감옥에 다시 투옥되었고, 석방 뒤 안악의 양산학교(楊山學校)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0년 신민회의 황해도 대표로 참가했으며, 이 회의에서 국내에서는 대일항쟁을 전개하고 국외에서는 만주에 무관학교를 세워 광복군을 양성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17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두 번의 감형으로 1914년에 가출옥되어, 동산평(東山坪) 농장에서 농장관리인으로 일하며 농촌운동을 전개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上海(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 경무국장으로 취임, 이어서 내무총장·국무총리대리·국무령(國務領)을 지내면서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1928년 이동녕·이시영·조완구(趙琬九)·조소앙(趙素昻)·안창호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결성해 당수가 되었으며, 1929년 재중국거류민단 단장도 함께 맡았다.

1931년에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1932년 그의 지휘 아래 있던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려다 실패하고, 윤봉길은 상하이 훙커우[虹口(홍구)]공원에 폭탄을 던지는 등 무력활동을 시작했다. 1933년에는 장제스[蔣介石(장개석)]와 만나 광복군 무관양성소 설치를 합의했고, 1935년 이동녕·조완구·김붕준(金朋濬)·엄항섭(嚴恒燮) 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지지세력이 될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새로이 창당했다. 1939년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였고, 1940년에는 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한국민주당 3당이 합당하여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자 그 집행위원장이 되었으며, 한국 광복군총사령부를 조직하여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을 임명했다. 1944년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임, 19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일본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했으나 8·15로 귀국했다.

불행히 임시정부는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고,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가 결의되자 이에 반대하는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1946년 2월 국민회의 비상국민회의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 뒤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 부의장, 민족통일총본부 부총재 등을 지내며 이승만과 함께 우익진영을 이끌었다.

1948년 유엔소총회에서 남한만의 총선거가 결의되자 이에 반대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 김규식(金奎植)과 함께 북으로 가 평양에서 정치회담을 가졌으나 실패했다. 그 뒤 남한만의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이 정권을 장악했으나 그는 계속 민족의 양심에 호소하여 민족통일의 원칙을 주창했다. 1949년 6월, 현역 육군소위 안두희(安斗熙)에 의해 경교장(京橋莊)에서 암살당하였다. 그해 7월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김구암살사건의 진상은 오랜 기간 규명되지 않고 있었으나, 민간차원의 꾸준한 조사가 진행된 결과 안두희의 우발적 단독범행이 아니라 면밀하게 모의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최소한 도의적 책임이 있고 사건 뒤처리에 개입한 것이 확인되었다. 김구는 완전한 자주독립노선을 추구한 지고지순한 민족주의자로 평가받고 있다. 저서로 《백범일지(白凡逸志)》가 있다.

유관순 (柳寬順 1904∼1920)

요약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천안(天安) 출생.

설명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천안(天安) 출생.

1916년 기독교감리교 공주교구(公州敎區)의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에 교비생으로 입학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등과 제1학년생으로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그 후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귀향하여 예배당을 중심으로 서울의 독립시위 상황을 설명하면서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조인원(趙仁元)·김구응(金球應) 등의 마을유지들을 규합하고 연기(燕岐)·청주(淸州)·진천(鎭川) 등 각지의 교회와 유림계의 찬동을 얻어, 같은 해 음력 3월 1일 아오내[竝川(병천)]장터에서 수천 명의 군중을 모아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 많은 인사들이 피살되었으며, 유관순은 주모자로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다. 공주지방법원의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으면서도 항거하고 7년형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에도 독립만세를 부르며 옥중항쟁을 전개하다가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규식 (金奎植 ?∼1929)

 

요약

독립운동가. 호는 호은(芦隱), 별명은 호장군(虎將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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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호는 호은(芦隱), 별명은 호장군(虎將軍). 경기도 출생.

대한제국 시위대부교(侍衛隊副校)·육군연성학교(陸軍硏成學校) 조교로 있다가,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강원도 철원(鐵原)으로 가서 의병운동을 일으켰다. 4차례 일본군과의 접전을 모두 승리로 이끌고, 노령(露領)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그 뒤 한반도가 식민지화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9년 8월 군정부 중심인물로 활약하다가, 그 해 12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가 조직되자 사단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보병대대장으로 활약하여 대승을 거두는 데 기여하였다. 같은 해 밀산(密山)에서 대한독립군단이 편성되자 총사령관이 되어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이후 망명군을 재편성하는 한편, 독립사상 함양에 진력하였다. 1923년 옌지현[延吉縣(연길현)]에서 이범석(李範奭) 등과 고려혁명군을 조직, 총사령관으로서 영농과 군사훈련을 강화하여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1929년 공산당원에게 피살되었다. 광복 후,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조만식 (曺晩植 1882∼1950)

 

요약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고당(古堂).

설명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고당(古堂). 본관은 창녕(昌寧). 평안남도 강서(江西) 출생. 1905년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일본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정칙영어학교)]를 거쳐 1910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명치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그 무렵 인도의 독립운동가 M.K. 간디의 무저항주의·인도주의에 공감하여 이를 독립운동의 본보기로 삼았다. 1913년 귀국하여 이승훈(李昇薰)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사로 있다가 2년 뒤 교장이 되었다. 1919년 교장직에서 물러난 뒤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1년간 복역하였다. 그 뒤 평양기독교청년회총무, 산정현교회 장로를 지냈으며,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여 국산품애용운동에 적극 앞장섰다. 1923년 송진우(宋鎭禹)·김성수(金性洙) 등과 연정회(硏政會)를 발기,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하였으며, 1927년 신간회(新幹會) 활동에 참여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1930년 관서체육회장을 지내고 1932년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높이는 동시에 비폭력·무저항·불복종의 민족주의운동을 호소하였다. 1943년 지원병제도에 반대하여 구금당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 평양에서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위원장에 취임하였고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당수로서 반탁운동(反託運動)을 전개하다가 소련군에 의해 연금되기도 하였다. 끝내 월남하지 않고 있다가 1950년 10월 18일에 공산당에 의해 총살당했다고 전해지나 분명하지는 않다. 평생을 기독교정신에 입각하여 살았으며, 민족주의자로서 일관된 삶을 유지하였다.
 

김좌진 (金佐鎭 1889∼1930)

요약

독립운동가. 호는 백야(白冶).

설명

독립운동가. 호는 백야(白冶). 본관은 안동(安東).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생. 명문가에서 태어나 1904년 15세 때 가노(家奴)를 해방하고 토지를 소작인에게 분배하여 근대화에 앞장섰으며, 이듬해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설립하였다. 을사늑약 체결 후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등의 간부를 지내고, 1913년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위해 활동하다가 1915년 체포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 1917년 만주로 망명, 1919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여 총사령관에 취임하고,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를 설치하였다. 이듬해 북로군정서의 군대를 동원하여 청산리(靑山里) 전투를 총지휘하며 일본군 제19·21사단을 상대로 격전을 벌여, 무장독립운동사상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그 뒤 부대를 이끌고 헤이룽강[黑龍江(흑룡강)] 부근으로 이동,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여 부총재로 취임하고, 일본군의 보복작전을 피해 1921년 노령자유시(露領自由市)로 이동하였다가, 이듬해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 타격을 받고 다시 만주로 들어왔다. 1925년 닝안[寧安(영안)]에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 군사집행위원장이 되고,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워 정예군을 양성하였다. 항일투쟁과 동포의 단결에 힘쓰다가 과거의 부하였던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의 김일성(金一星)·박상실(朴相實) 등에게 영안현(永安縣) 중동선(中東線) 산시역(山市驛) 자택 앞에서 암살당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윤봉길 (尹奉吉 1908∼1932)

요약

독립운동가. 본명은 우의(禹儀).

설명

독립운동가. 본명은 우의(禹儀). 충청남도 예산(禮山) 출생. 1918년 덕산보통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 2년을 다니다 중퇴한 후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1921년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중국 고전을 배웠으며, 1926년 농촌부흥을 위한 농민계몽운동에 참여했다. 이듬해는 빈곤해서 취학하기 어려운 아동을 모집하여 야학을 열고 이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저술했다. 또한 1929년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여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등 농촌부흥운동에 앞장섰다. 1930년 가족에게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고 쓴 편지를 남겨 놓고 망명, 중국 칭다오[靑島(청도)]에 들어가 모직공장 직공, 세탁소 직원으로 일하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찾았다. 1931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上海(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겨 프랑스조계(租界) 하비로화합방(霞飛路和合坊) 동포석로(東蒲石路)에 있는 안공근(安恭根)의 집에 숙소를 정했다. 생계를 위하여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공장에서 일했으며, 상하이영어학교를 다녔다. 그해 겨울 임시정부의 국무령 김구(金九)를 찾아가 독립운동의 의지를 밝히고 기회를 마련해 줄 것을 요청했다. 1932년 1월 8일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일본 도쿄[東京(동경)]에서 일본왕을 죽이려다 실패하자, 상하이 일대는 한층 복잡한 정세가 되었다. 또한 일본의 군벌은 상하이를 침공했는데 처음에 참패한 분풀이로 주택지에 무차별폭격을 가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일본은 자신들의 실패를 은폐하고 크게 승리한 것처럼 세계에 선전할 목적으로 일본왕의 생일인 4월 29일에 훙커우공원[虹口公園(홍구공원)]에서 전승기념식을 열기로 했다. 이에 김구·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 등의 협의 끝에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정했다. 4월 29일 식장에 참석하여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상하이파견군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백천의칙)], 상하이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河瑞貞次(하서정차)] 등이 즉사했고,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郎(야촌길삼낭)],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식전겸길)],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로루[重光葵(중광규)] 등은 중상을 입었다. 그 밖에 식에 참석했던 군관민 다수가 부상했다. 윤봉길은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오사카[大阪(대판)]로 호송되어 12월 19일 총살형을 당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윤동주 (尹東柱 1917∼1945)

요약

시인. 아명은 해환(海煥).

설명

시인. 아명은 해환(海煥). 북간도(北間島) 명동촌(明東村) 출생. 기독교 장로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다.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 1929년 문예지 《새명동》 발간에 참여하였고, 1931년 대랍자(大拉子)의 중국인관립학교를 거쳐 1932년 용정(龍井)의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하였다. 1935년 평양(平壤)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로 옮겼으나 신사참배문제로 폐교되자, 용정의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하였다. 1938년 서울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에 입학, 19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하였다. 1942년 일본 리쿄대학[立敎大學(입교대학)] 영문과 입학, 그해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동지사대학)]으로 전학하였다. 1943년 귀국 직전에 항일운동을 한 혐의로 송몽규(宋夢奎)와 함께 체포되어 2년형을 받고 규슈[九州(구주)] 후쿠오카형무소[福岡刑務所(복강형무소)]에서 복역중 1945년 옥사하였다. 그의 시는 초기 시부터 마지막 작품으로 보이는 《쉽게 쓰여진 시》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적 변모를 드러내고 있다. 초기 시 《겨울》 《조개껍질》 《버선본》 등에서는 암울한 분위기와 유년적 평화를 지향하고 있으며, 후기 시 《서시》 《자화상》 《별 헤는 밤》 등에서는 역사감각을 지닌 자아성찰을 보여준다. 그는 자전적이고 내성적인 시, 그리스도교 신앙에 바탕을 둔 실존적 윤리의식, 그리고 시대와의 갈등에 성실했던 민족의식을 나타낸 시를 썼으며, 이러한 주제를 고도의 상징과 은유적 기법으로 독특하게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한국시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유해는 용정에 묻혔고, 1968년 연세대학교에 시비가 세워졌다.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있다.